“미요!”
미요가 익숙한 외침에 뒤를 돌아보니 카이토가 교실 뒷문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양손에 우마이봉을 들고 눈 오는 날의 강아지처럼 펄쩍 뛰는 모습을 보니 한숨부터 나왔다. 남의 교실에서 그렇게 크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시선이 모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교실에서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말랬잖아.”
미요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카이토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러나 카이토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도리어 뻔뻔하게 웃어 보였다. 환영받지 못하리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요짱이 앞에 앉아있어서 큰 소리로 부르지 않으면 안 돌아보잖아.”
“그럼 왜 왔는데? 오늘도 이유 없이 온 건 아니지?”
“맞아. 그냥 왔어.”
“….”
명료한 대답에 미요는 입을 꾹 다물고 카이토를 매섭게 응시했다. 그 시선이 카이토를 아프게 찔렀다. 무관심하고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향할 때면 속이 타들어 갔다. 물론, 고작 이 정도의 좌절로 주눅들 생각은 없었다. 카이토는 다시 능청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없이 우마이봉을 건네주었다. 역시나 미요는 고개를 가로저어 거절했다.
“그럼 방과 후에 찾아오면 되잖아.”
“하지만 미요짱이 보고 싶은걸.”
“방과 후에 봐.”
“너무해.”
퉁명스러운 대답이 연이어 들리자, 카이토는 서운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하면서 유독 자신에게만은 매정한 그녀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거의 이주일째 쉬는 시간에 찾아와서 미요를 부르고, 반 아이들의 시선을 그녀에게로 모은 뒤 사소한 잡담이나 하고 돌아가는 짓을 반복하니 질색할 만도 했다. 그렇다면 그 뒤에 숨은 자신의 본심에 대해 말이라도 한 마디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거절을 하든, 수락을 하든, 어느 쪽이라도 확답을 준다면 이렇게까지 미요가 좋다는 티를 내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요는 카이토의 진심을 눈치챈 것이 분명했지만 그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음 주부터는 이러지 마.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서 다른 애들한테도 민폐야.”
“…알겠어.”
결국 오늘도 아무 소득이 없었다. 카이토는 미요의 따끔한 타박을 듣고는 순순히 수긍했다. 시험 기간에까지 교실의 분위기를 어지럽혀서 미요마저 밉보이게 할 수는 없었다. 카이토는 다음 주부터는 다른 수작을 부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가기 전에 신신당부를 했다.
“그럼 오늘도 우리 집으로 와.”
“알았어.”
미요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이토의 머릿속에는 온통 미요의 관심을 끌 생각뿐이었다. 긍정적인 대답을 듣는 것까지는 무리더라도 자신의 존재가 신경 쓰이도록 하고 싶다. 이성적인 호감은 주의를 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카이토는 불쾌하지 않지만 인상 깊게 남을 수 있는 이벤트를 고민했다. 미요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는 카이토를 보자 이유 모를 불안감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카이토는 한 송이 빨간 장미꽃을 들고 미요를 맞이했다. 미요는 얼굴 위로 어떠한 표정도 떠올리지 않고 장미꽃을 내려다보았다. 예상처럼 밋밋한 반응이 오자 카이토는 쓰린 입맛을 다시며 손가락을 한 번 까딱거렸다.
“한 송이로는 아쉬운가?”
그의 손짓에 한 송이었던 장미꽃은 열 송이로 늘어났다. 순식간에 꽃이 피어나듯 카이토의 손안에서 만개한 장미꽃을 보아도, 미요는 무심하게 카이토를 밀고 신발을 벗었다.
“장난 그만 치고 들어와.”
“장난 아닌데, 조수님은 너무 매정해.”
미요는 꽃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카이토가 실없이 웃으며 신발장 위의 빈 화병에 장미꽃을 꽂아 두었다. 쌀쌀맞게 뒤돌아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야속했다. 달빛 아래에서 그에게 보여주었던 미소는 허상이었을까. 카이토는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미요의 미소가 이따금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냉대에 가슴 언저리가 따끔한 것을 보면 그날 허깨비를 본 것은 아니었다. 카이토는 미요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부러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
“친구가 빌려 갔던 필기 노트를 돌려준다고 해서 기다리느라.”
“흐음, 나한테는 안 빌려주면서.”
얼마 전에 미요의 반으로 찾아갈 핑계로 필기 노트를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세 번까지는 좋은 핑곗거리였지만 그 이후로는 단번에 거절당했다. 졸아서 수업을 놓쳤으니 필기를 빌려달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얄미운 이유기는 했다. 물론 수업은 성실하게 듣고 있었고 졸았단 말은 거짓말이었지만 말이다. 미요가 황당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카이토를 돌아보았다.
“아파서 결석해서 그래. 너도 처음에는 빌려줬잖아.”
“아하하, 미안. 그랬었지. 이제는 수업 잘 듣고 있어.”
카이토는 민망하게 웃은 뒤 주방 입구에 멈춰 섰다. 미요가 미간 사이를 좁히며 카이토를 재촉했다. 방금의 대화로 상당히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다다음 주부터 시험 기간이라서 이거 끝나고 도서관에 갈 거야. 할 말 있으면 빨리 와.”
“잠깐만. 그래도 손님인데 뭐라도 내와야지. 조수님은 음료수 대신 차 좋아하지?”
“응.”
새삼스럽게. 미요는 한결 풀어진 얼굴로 싱크대 위의 상부장에서 찻잎을 꺼내는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항상 카이토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소소한 차나 과일을 대접받았다. 미요는 과자나 음료수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와 과일은 카이토가 골몰해서 준비한 최선의 선택지였다.
“먼저 들어가 있어.”
카이토는 메리골드 찻잎이 담긴 주전자를 정수기 물꼭지 아래에 두고 온수 버튼을 눌렀다. 그는 뜨거운 물이 느리게 차오르는 동안 자신의 방으로 사라지는 미요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방문 근처에서 흩어지다가 사라지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자신에게 한순간의 빈틈도 내어주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처럼, 칠흑같이 완벽한 검은색의 머리카락은 잔상이 되어 카이토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카이토는 마른 입술을 짓씹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품은 감정의 길은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했다. 그러나 카이토는 괴도였고,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마술처럼 목적을 이루는 것이 본업이었다. 카이토는 마음을 가다듬고 찻주전자와 세트인 찻잔을 두 개 꺼내 쟁반 위에 정갈하게 놓았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얻지 못할 것은 없다. 카이토는 조급한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쟁반을 들어 미요에게 걸어가는 그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KULIBA KAITO X CHEUBAKI MIYO
CM 탈님